2009. 3. 29. 15:37

장기하가 소비되는 방식


장기하에 대한 열광은 이해가능한 사건이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그의 일부 노래에는 분명 독특한 페이소스가 담겨있다. 나에게 언제나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래서 내 손발이 막 오그라드는 그의 자기연출 역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참을 수 없이 귀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지금의 장기하는 '유니크한 존재'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장기하에 대한 기성언론을 포함한 미디어 일반의 과도한 사회적 의미부여를 정당화해주진 못한다. 그가 88만원 세대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데 대해 장기하 스스로가 인터뷰 등을 통해 여러 차례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다. 순전히 나의 직관에 불과하지만, 장기하 현상의 사회적 의미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88만원 세대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주이상스에 더 닿아있다는 점이다. 구매력, 문화자본, 상징자본을 가진 30대 이후 세대에게 달콤쌉싸름했던 자기 학창시절의 추억과 감수성을 적절한 형식으로 환기시키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언론은 이를 다시 특정세대의 서정성으로 환치시키지만, 글쎄, 정말 그런지 의문이다. 서민들이 자신의 삶과 하등 무관한 재벌가의 연애담을 상상적으록 구성한 통속드라마에 탐닉하는 것은 그저 무지몽매해서가 아니다. "저 사람들도 사는 건 다 비슷하지 뭐"라는 환각 혹은 동일시를 경험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획득하기 쉬운 쾌락의 하나여서다. 서민들은 리얼리즘 이란 이름 하에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이 날것으로 전시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장기하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상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지점에서 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장기하가 서울대이기 때문에 그 루저감성이 기성세대와 제도권에 더 편안하게 추인받을 수 있고, 반면에 서울대이기 때문에 그 루저감성을 계속해서 의심받게 되는 역설. 비루한 현실은 추억될 때만 아름답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보자.  세계의 비참은 '매개'되고 '재구성'될 때에만 소비될 수 있다. 실제로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에 의해 비참한 현실이 직접 폭로되는 것은 쾌락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법이다. 그런 사건은 숭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장기하를 '88만원 세대의 대표가객' 등으로 규정하거나 '포크락 리얼리스트'로 만들어버리는 건 분명 억지스런 규정이지만 그 자체로 일말의 진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