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8. 22:54

원고 마감

일본 계간지 <현대의 이론>에서 청탁한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냈다. '신자유주의 이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특집에 들어갈 글이다. 번역을 전제한, 또 시의성 강한 글은 맥락설명과 용어사용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쓰기가 정말 까다롭다. <88만원 세대> 일본판 번역과정에서도 느꼈지만, 일본의 편집자는 정말 편집증적 인간들이다. 숨이 턱턱 막히게 꼼꼼하다. 아무튼 원고작성 과정에서 워크 셰어링 관련된 해외자료를 인터넷으로 좀 검색해보았다. 내가 얼마 전에 전경련의 일자리 나누기 개념을 일자리 쪼개기(job split)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는데, 사실 이건 즉석에서 끼워맞춘 단어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외국에선 심심찮게 상용되고 있던 용어였다. 정확히는 job splitting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편집자 말로는 용산참사(청와대의 이메일 코미디까지 포함해서)가 일본쪽 언론에는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고 후반부에 사건의 전말을 알기쉽게 요약정리해 주었다. MB정권의 이 모든 미친 짓들은 글로벌하게 공유할 필요가 있다. 아래는 대졸초임삭감 관련 챕터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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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일본의 경단련(經團聯)과 유사한 단체가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약칭 ‘전경련’이 그것이다. 전경련은 2009년 2월 25일, 30대 그룹 채용담당임원들이 참석한 ‘고용안정을 위한 재계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전경련은 대기업 신입사원 임금을 최대 28% 삭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계획이 “인건비 절감을 통해 인턴직원을 더 뽑기 위한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라 밝혔다. 신입사원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대기업 임원진의 연봉삭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며칠 후 공기업 경영진들도 ‘신입사원 임금을 최대 30% 삭감할 것’이라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금융기관과 민간기업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추세다.


그러나 전경련의 발표는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스스로 명시한 “고용안정”이라는 목표와 “인턴사원을 더 고용하겠다”는 수단은 명백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인턴사원’은 풀타임 비정규직 노동자를 의미한다. 요컨대 전경련은 불안정 노동자(비정규직)을 고용하기 위해 신입사원의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정말로 ‘고용안정을 위한 일자리 나누기’라면 잡 셰어링(job sharing)이 아니라 워크 셰어링(work sharing)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게 정확하다. 워크 셰어링은 잘 알려진 것처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고용의 안정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고용을 늘리는 방식이다. 이것은 사민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고 성공사례도 적지 않다.

언론 등에서는 보통 잡 셰어링과 워크 셰어링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곤 하지만, 이번에 한국의 전경련이 발표한 ‘잡 셰어링’은 정규직 신입사원의 실질임금을 삭감해 비정규직을 고용하겠다는 것이므로 실은 ‘일자리 쪼개기(job splitting)’라 이름 붙여야 적절하다. ‘일자리 쪼개기’는 ‘노동의 유연화’ 또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의 한 방식으로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고용형태이다. 따라서 고용의 질과 안정성이 글로벌 이슈로 등장하고, 워크 셰어링의 성공사례가 축적되었으며,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더욱 명확해진 현재 시점에서 이런 방식을 고용문제의 해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은 이미 오래 전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숫자가 정규직을 압도했고 OECD 회원국 중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가장 심각한 사회다. 국가경제를 위축시킬 정도로 엄청난 비정규직 문제 때문에, OECD, ILO, IMF 등 국제기관으로부터 강력한 경고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전세계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말하고 있는 지금, 비정규직 차별이 어떤 국가보다 심한 한국에서 전경련은 그렇게 ‘더 강한 신자유주의’를 외치고 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나 기업집단이 자신의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그런 책임전가의 방식 중에서도 최악의 형태라 할만하다. 특정 세대, 다시 말해 아직 노동조합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예비 노동자인 20대 청년들에게 경제위기의 고통을 모두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삭감이 이대로 진행될 경우, 20대의 생애전체소득은 심각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양질의 일자리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탓에 임금삭감을 하지 않더라도 20대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 일본에서도 번역 출판된 <88만원 세대>는 그런 20대에 관한 책이었다. 한국의 기업집단은 경제위기를 핑계로 또다시 그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기업집단의 돌출행동이 아니었다. 경제전문지인 <머니투데이>의 2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잡 셰어링’ 논의의 진원지는 청와대 지하벙커”다. 일본의 독자들은 ‘지하벙커’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의 지하에는 전쟁상황에 대비한 지하벙커가 있는데, 몇 개월 전부터 이명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있고, 그 사실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려왔다. 위기에 대처하는 대통령의 각오를 보여주겠다는 ‘한국적 쇼맨쉽’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보도에 따르면, 2009년 1월 15일 열린 제2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고통분담 차원에서 임금을 안정시켜 실질적으로 고용을 늘리는 ‘잡 셰어링’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고, “대졸신입사원의 초임을 낮추는 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 달 남짓 지나 전경련의 발표가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