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1. 01:10

감정이입


그는 방안에서 뒹굴며 빈둥거렸다. 그의 형제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가족의 충성과 결속을 종교처럼 중시하는 종족과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 아주 점잖은 우리 고장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 그는 책을 읽으며 빈둥거렸고 다음날에도 다시 빈둥거리며 책을 읽었다."
분명히 그는 모든 것을 읽었다. 정치학 소책자, 경제학, 사회학, 루터교의 찬송가집, 고고학 논문 등등. 그러나 게으름 때문에 사회로부터 더욱 격리되었고, 더욱 신랄하고 내향적이 되었다. 성과도 없는 발명품을 만든다고 시간을 허비했고, 그 당시의 호화로운 행사에 대해 시큰둥한 논평을 했으며, 식물채집도 하고,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몇편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직장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결실도 없었다. 그에게는 남에게 호감을 살 만한 세련미나 풍채도 없었다. 그가 엘렌과 결혼할 당시 여자 쪽 가족이 무척 실망하면서도 결혼을 승낙한 것은 그가 최소한 먹고 살 수는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

인용된 글에 나오는 "그"는 다름아닌 소스타인 베블런이다. 훗날 베블런이 '한가한 무리들'을 해부하기로 결심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거다. 저 구절을 읽다가 너무 감정이입이 되는 바람에 쵸큼 무서웠다. 그래도 베블런은 천재였고 장가라도 갔는데...
출처는 <세속의 철학자들>(로버트L. 하일브로너, 장상환 옮김, 이마고,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