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3. 05:46

가족들에 관한 기억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나에게 다정한 분이었다. 원래 성정이 유쾌하고 정이 많은 분이기도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외항선을 타고 몇년씩 한국을 떠나있어야 했으므로 어린 아들과 많이 놀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흔히 말하는 '가부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분이다. 언제나 나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주고 나서 본인의 생각을 의문의 형태로 덧붙이는, 사려깊은 아버지이기도 했다. 또한 신문의 서평란을 체크하다 내 수준에 소화가 가능하다싶은 책이 있으면 즉시 사다가 내 책상에 놓아주셨다. 그러나 매를 아끼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나에게 엄격한 분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여장부였고 모든 일에 완벽주의자였다. 나에게 승부근성이나 독기, 집중력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마 대부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 아들에게 요구하는 기대수준이 무척 높았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치맛바람'도 상당했다. 형제가 없는 내게 늘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집에 계실 때엔 늘 내 친구들을 불러 발군의  요리센스를 발휘하셨다. 장사를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나를 외가에 맡겨두셔야 했기 때문에 늘 나에게 미안해 하셨다. 그러나 매를 아끼지 않으셨다.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의 이모는 내 국민학교 시절, 가족들 중 유일한 말동무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여서, 늘 집에 앉아 수를 놓아 표구점에 팔았다. 핏기없이 말간 얼굴로 한땀 한땀 소나무나 사슴 같은 영물을 수놓을 때면 나는 턱을 괴고 옆에 누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나 구창모의 '희나리'같은 노래를 흥얼대며 책을 읽었다. 내가 때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꾸며내기라도 할라치면, 그녀는 냉랭한 말투로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곤 했다. 이모는 가수들의 뒷얘기라든지 외국의 신기한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알고 있어서, 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매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모가 세상을 떠났던 날, 정말 많이 울었다.

큰외삼촌, 그러니까 어머니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그는, 가족들 중 나를 가장 이뻐했다. 나도 큰삼촌을 너무나 좋아했는데, 다섯살 무렵에 아무 망설임도 없이, 엄마를 내버려두고 당시 외가가 있던 제주도로 삼촌을 따라 갔을 정도다. 내 유년기의 일정기간은 오직 큰삼촌과의 기억 뿐이다. 사실상 그가 이 시기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했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간판에 적힌 한글을 읽기 시작하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기뻐했다고. 나에게 일절 매를 들지 않았지만, 30cm 정도의 각목에 테입을 감아 '사랑의 매'라 적어 가족공용 몽둥이를 만든 게 바로 그라는 사실이 십여년 후 밝혀졌다.

작은외삼촌은 어린 시절 월반을 거듭하던 유명한 수재였다고 한다. 외가가 너무나 가난해서 정상적인 코스를 밟아 대학에 가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했기 때문에 교사가 됐고, 불과 두어살 아래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중에 법대에 갔지만 집안형편은 나날이 나빠질 뿐이어서 오랜 꿈이었던 사법시험을 끝내 포기했다. 중학교 이후 고등학교 까지의 내 독서편력은 대부분 작은 삼촌의 영향 아래였다. 책장에는 창간 직후의 <말>지가 빽빽히 꽂혀있었고, 사회과학 서적도 많았다. 생일마다 빨간(?)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가 나를 때린 적은 딱 한번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우리집이 독서실을 할 때, 드나들던 뚱뚱한 여고생 누나가 있었는데 오며가며 마주칠 때마다 놀려댔다. 어느 날 작은삼촌에게 딱 걸렸다. 눈이 번쩍할 정도의 따귀가 날아왔고, 공책 다섯장 분량의 글을 써야했다. 단순한 반성문이 아니라 왜 사람의 외모를 놀림감으로 삼아선 안되는지에 대한 논술이었다.

외가에 살던 무렵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함께 계셨다. 손주를 끔찍이 이뻐하셨다는 것 외에 별로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내가 거의 거식증에 가까웠을 정도로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쫒아다니며 내게 밥을 떠먹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내버려 두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제시기 일본의 명문대로 유학을 갔던 전형적인 식민지 인텔리셨는데, 건축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한량기질이 좀 지나치셔서 가세가 날로 기울었다. 내가 일곱살 무렵 천자문을 매일 외워야 했던 건 순전히 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이다. 다른 가족들에게 많이 맞았기 때문에 두 분 모두 매를 드시진 않으셨고 내가 매를 맞고 있을 때 단 한번도 말리지 않으셨다.


한줄요약:  많이 맞고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