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28 06:10

굴뚝일보

이 겨울에 두 사람이 굴뚝에 올라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뭐라도 해보자고 만든 굴뚝일보. 


짧은 글귀 하나 보탰다.



굴뚝일보_3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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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2 14:02

미생, 일베, 그리고 능력주의라는 쇠우리

<미생>은 ‘고졸’ 계약직 사원 장그래가 종합상사에서 샐러리맨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장그래의 모습은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들의 현실과 겹쳐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 웹툰도 그랬지만 드라마 버전을 보며 새삼 눈에 들어온 건 작품 속에서 개인의 능력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되고 일중독은 바람직한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이었다.  (다소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 웹툰 <미생>에 관한 글은 3년 전에 하나 쓴 적이 있다. http://xenga.tistory.com/207 )


<미생>의 에피소드를 보면 주인공 장그래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얻는 오상식 차장이 계약직 사원들을 호출해 주말 내내 호텔에서 업무를 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쓰러진 동료의 일을 나누자는 '좋은 취지'였지만 그것이 초과근로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왜 계약직이 떠안아야 하는 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저 훈훈한 미담이요, '미생에서 완생으로 가는' 과정의 하나로 취급될 뿐. 


<미생>이라는 작품에는 상사의 폭언과 강압, 부당노동행위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초과근로 따위 애교로 보일 정도. 하지만 노동자들이 단결해 저항하거나 노동조합이 나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대처는 전부 개인의 몫이며 그 해결도 개인들의 호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그래서 더 리얼해 보이는 것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능력주의다. 능력주의란 쉽게 말해 인간의 능력은 측정가능하며, 그에 따라 차등대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몇 년 전 방송된 드라마 <직장의 신>도 이런 능력주의 신화를 전제하고 있었다. 알려졌다시피 <직장의 신>은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의 리메이크작이다. 거기서 주인공인 파견직 여성은 거의 모든 업무에서 달인의 경지에 오른 만능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설정은 당연하게도 '무능한 대다수 정규직'과의 대비를 극대화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사회모순을 풍자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물론 비정규직이라해서 무능한 게 아니며 정규직이라해서 유능한 게 아니라는 지적은 그 자체로 올바르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지적이 발딛고 있는 토대는 생각보다 훨씬 모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능력에 대한 선망, 그리고 무능력에 대한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혐오를 정당화하는 문제는 그리 무자르듯 간단치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능력'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판단되는가라는 물음, 그것은 이데올로기 분석을 수반하는 발본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 소비자주의, 반생태적 생산력 중심주의를 내면화하면 할수록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일종의 인식론적 쇠우리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능력주의자인 것이다. 


뜬금없지만 일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들의 심층적 동기는 그들을 “사회 낙오자 집단” 또는 “불가해한 괴물”로 규정하는 나태한 진보인사들에게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젊은 여성, 이주노동자, 정치적·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들의 혐오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자 의식에 기인한다. 누구로부터의 피해인가? 바로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즉 남자의 등골을 빨아먹는 “김치녀”,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외국인 노동자, 민주화운동 경력을 훈장삼아 호의호식하는 진보진영이다. 이런 자들이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애국시민”들의 몫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감각, 일종의 정의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 감각의 뿌리를 더듬어가다 보면 극단화된 능력주의가 놓여있다. 이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무능력자에 대한 배제와 증오를 정당화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소수자와 약자를 2등 국민화하는 인종주의와 연결된다.


일베의 능력주의는 미생의 능력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근대 이후에 겨우 형성된 평등에 대한 감각이 유례없이 희미해진 오늘날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미생과 일베는 같은 층위에서 논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청년세대의 두 측면을 부각시키는 키워드이다. 동시에 그 둘은 한국사회에 내면화된 능력주의의 두 가지 판본을 보여주는 절묘한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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