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2. 14:44

저성장 시대의 성장서사: <미생>과 <골든타임>

계간 <R> 2012 가을호  hybrid critique 01

 

저성장 시대의 성장서사
웹툰 <미생>과 드라마 <골든 타임>

 

한국에서 최근 10년 내에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인 대중문화를 꼽는다면 단연코 웹툰이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가장 친숙한 대중문화이기도 하다. TV 드라마 역시 1‧2차 한류 붐을 통과하며 질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대중과의 접촉면이 가장 넓은 두 장르에서 심심찮게 수작이 튀어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음에 연재중인 웹툰 <미생>과 문화방송 드라마 <골든 타임>은 전혀 다른 플랫폼에 담긴 서로 무관한 문화상품이지만 하나의 열쇠말로 이야기해볼만한 작품들이다. 바로 ‘성장’, 성장담이라는 것.

 

개별 작품에 대한 미학적 비평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 굳이 거기에 한 마디 더 보탤 이유는 없다. 이 글은 비평이나 대중들의 반응까지 포함한 일종의 메타비평(여기서 메타비평은 비평에 관한 이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이다. <미생>과 <골든 타임>의 인기와 호평은 일차적으로 작품의 완성도에 기인한 것이지만, 대개의 성공한 대중문화상품이 그러하듯이 시대상황을 적절히 반영한 소재와 메시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어떤 작품이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아직 살지 못한 자”와 “이름 없는 자”

 

‘미생(未生)’은 바둑용어로 두 집(완생)을 만들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작가 윤태호는 그래서 작품의 부제를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로 붙였다. 매회 첫머리에 유명 바둑기사의 기보가 등장하고 문외한에게 생소한 바둑용어들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 웹툰은 바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주인공은 한국기원의 바둑연습생이었으나 끝내 프로 바둑기사가 되지 못한 청년 ‘장그래’다. 남들이 초‧중‧고교를 다니며 정규교육을 받은 시간을 온전히 바둑에 쏟아부었음에도 번번이 입단시험에서 미끄러지며 결국 바둑의 길을 접었다. 군대를 다녀와 보니 그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학력도, 자격증 하나도 없는 막막한 상황. 죽으란 법은 없는지, 바둑 두던 모습을 눈여겨보던 지인의 소개를 통해 그는 어느 회사의 인턴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부터다. 바둑 실력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청년이 종합상사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화이트컬러의 노동이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 것이다.

 

다른 한 작품 <골든 타임>은 의학 드라마이다. 교통사고나 천재지변 등으로 신체에 동시다발적인 손상을 입은 환자, 즉 중증 외상환자를 다루는 부산의 어느 종합병원 응급의학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골든 타임’은 중증 외상 환자가 생존을 위해 처치받아야 하는 시한을 의미한다. 이 시한을 넘기면 환자의 생존확률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드라마의 주인공 이민우는 의대에 들어갔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흥미도 의욕도 없는 남자였다. 취미로 의학 관련 ‘미드’ 자막을 인터넷에 올리고 한방병원에서 엑스레이 오더나 내리며 편하게 살던 그였지만, 우연히 선배 대신 병원 응급실 당직을 서다 사고로 온 아이의 생명을 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미숙함으로 한 생명이 꺼져 들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겪으며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결국 이민우는 우연히 휘말린 사고로 알게 된 중증 외상 전문의 최인혁이 근무하는 병원에 인턴으로 지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턴에게 이름이 어딨냐”는 레지던트들과 정신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에 하루에도 몇 번씩 ‘멘탈이 붕괴’하는 응급실 생활이 시작된다.

 

출세에서 생존으로

 

샐러리맨의 삶을 그린 문화상품은 셀 수 없이 많다. 만화는 더욱 많다. 샐러리맨의 일상을 그린 <미생>이 그런 작품들과 비교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미생>의 스토리에 윤곽이 잡히기 시작할 무렵 많은 사람들이 했던 말이 “한국의 <시마과장>”이라는 칭찬이었다. <시마과장>은 굴지의 재벌기업에 다니는 시마 코우사쿠를 주인공으로 샐러리맨의 삶을 그린 만화로, 일본에서 1983년부터 연재되어 국민적 인기를 모은 작품이다. 훗날 시마 부장, 시마 이사, 시마 사원까지 나와 ‘회사인의 바이블’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미생>은 <시마과장>과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히로카네 켄시라는 작가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시마> 시리즈에서 회사에 명줄이 걸린 샐러리맨의 절박감이 설득력 있게 표현된 적은 거의 없다. 시마 코우사쿠는 명문대를 나와서 평탄하게 회사생활을 하며 이사까지 승진한다. 파벌을 싫어하지만 출세가도에서 배제된 것도 아니다. 출장이나 각종 업무마다 미인들이 꼬여들어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한다. 솔직히 말해서 시마 코우사쿠 시리즈는 ‘대기업 엘리트의 행복한 나날’을 그린 작품이다. 거기서 회사인의 절절한 ‘애환’이나 ‘갈등’은 그저 ‘포즈’ 또는 ‘클리셰’로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미생>은 다르다. 장그래는 출발부터가 절박했다. 아버지 사업은 망했고 어머니는 부쩍 늙어버렸으며 자신은 아무런 스펙도 지식도 없이 종합상사의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다. 인턴은 인턴끼리 살벌한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경쟁을 뚫고 인턴 딱지를 떼 봐야 계약직 사원이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처지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승부사 기질과 날카로운 직관뿐이다. 동기로 들어간 인턴사원들은 좋은 대학에서 경영학 따위를 공부하고 영어와 각종 자격증으로 무장한 친구들이다. 장그래는 이들의 대화만 따라가기도 벅차다. 무언가 전문용어를 쓰는 것 같은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작가 윤태호는 유명한 바둑 격언들을 절묘하게 배치하며 ‘샐러리맨의 생존술’을 풀어나간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것은 샐러리맨의 생존술이라기 보다는 ‘사회초년생의 생존술’이다. <미생>은 <시마과장>보다는 차라리 허영만의 유명한 기업만화인 <아스팔트 사나이>나 <미스터 큐>의 계보에 놓인 작품이지만, 그런 만화들에서 보이는 고도성장기 특유의 허장성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귀두컷’을 하고 와이셔츠엔 고춧가루 묻힌 멍청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회사업무에서는 얼마나 노련한 장인들인지, 때로는 얼마나 교활한 여우들인지를 윤태호는 압도적인 리얼리티로 그려낸다. 그런 그들 틈에서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 그래서 장그래의 목표는 출세가 아니다. 생존이다.

 

‘최선의 세계’라는 신기루

 

해운대 세중병원 인턴 이민우의 눈동자는 항상 초점을 잃고 흔들린다. 응급환자가 들어와 기도삽관을 시도할 때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흐른다. 환자의 바이탈 사인은 순간순간 악화되는 중이다. 그러나 인턴은 말이 좋아 ‘선생’이지 “아무 것도 판단해선 안 되고 아무 것도 해선 안 되며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되는” 존재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화기를 붙잡고 당직 선생님들에게 미친 듯이 ‘콜’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당직의가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수술실은 풀가동되고 있고, 모든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느라 정신이 없다. 반면 응급외상센터는 병원 적자의 주범으로 눈총을 받고 있다. 항상 스탠바이 중인 이는 최인혁 교수뿐이다. 이민우가 다시 본격적인 의사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사람, 존경하는 멘토이자 스승이다.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수술로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내는 최 교수지만 병원의 스태프 교수들 사이에서는 ‘왕따’이다. 응급환자를 살린다는 이유로 절차와 질서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골든타임>은 그 무엇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고 “사람 목숨 값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최인혁)”이라는 대원칙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관철하기 힘든 당위인지를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인턴 이민우의) 뜨겁지만 설익은 휴머니즘에 얼음장 같은 냉수를 끼얹는 상황과 대사들이 이어진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선을 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소위 ‘<골든타임>의 명대사’로 회자되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선택에 대한 문제다. “지금은 나쁜 것과 좋은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순간이야(최인혁)”“모든 운이 따라주고, 인생의 신호등이 동시에 파란불이 되는 때란 없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황은 없는 거야. 만약 중요한 일이고 ‘결국’ 해야 할 일이라면. 그냥 해. 앞으로도 완벽한 때란 건 없어(박금녀)”

 

성장이란 ‘포기할 때와 장소를 깨닫는 일’이라는 것을 이 드라마는 격렬하게, 때로는 담담하게 알린다. ‘시간’과 ‘돈’, 예산제약 상황을 만들어내는 이 두 가지 절대원소 앞에서 말랑한 감상주의나 모호한 휴머니즘은 가루처럼 분쇄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해명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골든타임>이 그리는 “실재의 사막”에서 최선의 세계는 신기루일 뿐이다.


럼스프린가: 탕자는 돌아올 수 없다

 

한국에 “미국판 청학동”이라고 종종 소개되기도 한 아만파(amish) 마을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 18세기적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만파 마을 사람들은 화려하고 요란한 현대문명과 소비문화를 최대한 거부하며 금욕적이며 경건한 삶을 꾸려간다. 슬라보예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아만파 공동체의 어떤 독특한 풍습을 소개한다. 그 풍습의 이름은 ‘럼스프린가’다.

 

미국의 아만파(amish) 공동체에는 럼스프린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다(rumsringa, 독일어 herumspringen에서 온 말로서 주위를 뛰어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17세가 되면 그들의 아이들은 (그때까지 그들은 엄격한 가정규칙에 종속된다) 자유롭게 되어 밖으로 나가 그들 주위의 “영어” 세계의 방식들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허락되며 심지어 조장된다. 그들은 차를 몰고 다니며 팝음악을 듣고 텔레비전을 보며 음주와 마약과 난교를 경험한다. 몇 년 후 그들에게는 결정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들이 아만파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곳을 떠나 일반적인 미국시민이 될 것인가? 두 쪽에 대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해결책은 아주 편파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있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이라고 해야 한다면 거짓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 “영어” 세계의 위반적‧불법적 쾌락들에 대한 오랜 세월의 훈육과 환상 뒤에 아만파 청년들은 갑자기 그리고 준비없이 그 속으로 내던져진다. 물론 그들은 극단적으로 위반적인 행동들에 탐닉하여 “그것을 모두 시험해”보며 자신들을 섹스와 마약과 음주 속으로 완전히 내몰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 그들은 모든 내재적인 한계나 규제를 결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자유로운 상황은 예상에 어긋한 결과를 초래하며 참을 수 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몇 년 후 그들이 격리된 그들의 공동체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안전한 도박이다. 90퍼센트 이상의 아이들이 정확히 그렇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생각에 항상 수반되는 어려움에 대한 완벽한 사례이다: 아만파 청소년들은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부여받지만, 선택을 하는 동안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조건은 선택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진정 자유로운 선택을 하려면 그들은 선택이 가능한 상황 속에서 교육받았어야 하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적절히 알고 있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647쪽


럼스프린가 사례를 두고 지젝의 길고 긴 재담이 계속 이어지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우리가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저항이라 인식하는 행동들이 결국 체제의 재생산과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이런 물음은 그 어떤 급진적 저항도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걸 은밀하게 인정해버린 좌파의 무기력으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한 처절한 시도다. 지젝은 의사(pseudo)-자유, 가짜의 능동성 대신 전복적인 수동성(그가 ‘바틀비 정치학’이라고 부르는 것, 예컨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잠정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다. 정말로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외설적 매듭을 푸는 방법”을 그가 제시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럼스프린가는 <루가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에피소드의 아만파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방탕한 생활로 모두 탕진해버리고 돼지치기로 전락해버린 둘째 아들이 뼈아픈 후회 끝에 회심하고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둘째 아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축연까지 열어준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명백하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깊이 참회하고 회개하면 은총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성장담 역시 본질적으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철없고 성급한 천둥벌거숭이는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낯선 세계에 매혹당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익숙한 것과 결별한 뒤 그가 마주치는 것은 거짓과 기만과 위선이다. 그는 싸우고 패하고 도망치고 쓰러진다. 환멸과 분노에 괴로워하고 날선 적의와 악전고투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이 모든 통과의례를 거쳐 그/녀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야 끝이 난다. 계약직 사원이 어엿한 상사맨이 되거나 인턴이 한 몫 제대로 하는 전문의가 되면 성장담은 끝난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된다는 게 아니라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는 존재의 혁신이다. 아니, 그렇게 ‘포장’되고 ‘미화’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장담은 럼스프린가가 보여준 바대로 젊은이에게 진정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부여하는 압력을 견뎌낸 젊은이를 추려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돌아온 탕자’는 더 이상 탕자가 아니다. 체제에 순치된 젊은이만이 돌아올 수 있다. 진정한 탕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형적인 성장담은 불안과 혼돈의 세계에서 안정과 성숙의 세계로의 당당한(그리고 쓰디쓴) 편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보수(保守)의 멜랑콜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수의 탁월한 성장담은 그 한계를 돌파한다. 탕자는 집으로, 다시 말해 익숙한 세계로 돌아오는 대신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체제가 던지는 가짜 선택지를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지를 만든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탁월한 성장담은 이제 더 이상 성장담이 아니게 된다.

 

성장담의 근본적 불완결성

 

성장담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고 또 소비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단지 인간 삶의 보편성 때문이라 얼버무리고 넘어갈 만큼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보편성’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이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성장소설이라 불리는 <데미안>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작품들이 2012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만큼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물론 이 텍스트들은 과거에도 읽혔고 지금도 읽히고 있고 앞으로도 읽힐 정도의 ‘보편성’을 지녔다. 그야말로 불멸의 고전이다. 그러나 저 작품들이 당대에 갖추고 있던 핍진성(verisimilitude)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당대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달라도 너무 달라져버린 것이다. 삶의 시시콜콜한 디테일들이 조금씩 어긋나며 들어맞지 않다가, 결국 인간이라는 종적(種的) 유사성 외에 별다른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고전의 의미는 상당히 퇴색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모든 인간을 포괄할 정도로 그물이 거대해지면 역설적이게도 그 텍스트는 아무 것도 포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성장서사가 오늘날 핍진성을 상실했다는 말의 의미는 시대배경이나 문화, 사용하던 물건들의 차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물리적 시간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차이 때문이며 이 말은 곧, ‘삶의 양식 혹은 태도(modus vivendi)’가 변화했다는 뜻이다. 성장은 ‘상실의 경험’이다. 그것은 아이의 단계를 마무리하고 어른의 세계로 진입한 대가이다. 이를테면 청춘의 등가교환체계인 셈이다. 상실은 언제나 쓰디쓰고 고통스럽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경험이고 나도 나의 부모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닮은 단계를 밟아가며 어른이 된다. 성장담은 따라서 세대를 거듭해가며 변주되는 약속이다.

 

삶의 리듬이 거의 변하지 않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온 이후 각 세대의 경험이 과거에 비해 훨씬 이질화되었고 성장담도 변화했다.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개인’의 탄생으로 인해 성장서사는 점차 ‘진정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가까워졌다. 20세기의 성장담이 몇 세대를 거치면서도 그 원형이 상당 부분 유지되고 또한 그토록 엄청나게 양산된 것은 소위  20세기적 생산양식이 개인의 성장단계를 ‘보증’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근대적 의료/보육/교육체계 속에서 생물학적 나이에 따라 나뉜 발달단계가 제시되었고 개인의 삶은 이에 맞춰 전형화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근대 성장서사의 물적 기반이다. 예술은 결코 시대와 분리되지 않으며 당연히 성장담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인 지금 20세기적 성장담의 핍진성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생>과 <골든타임>은 형식만 보자면 전형적인 20세기 성장담이다. 주인공은 처음에 백지상태(tabula rasa)이지만 멘토를 만나고 학습하고 경험하면서 선형적 성장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목표는 프로페셔널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이들에게 데미안이나 깡디드처럼 자아를 찾기 위해 방황하거나 진리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여유는 없다. 한국에서 대학 캠퍼스의 낭만을 그린 드라마들은 1990년대에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였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런 작품을 기획하지 않는다. 맨손으로 시작해 거대한 왕국을 세우는 입지전적 스토리 역시 명맥이 끊겼다. 자아를 찾을 여유도, 신화를 만들 영웅도 없다. 반면 88만원 세대의 잉여적 삶을 그린 작품들은 차고 넘친다. 20세기적 형식에 오늘의 현실을 담다보니, 성장담은 이제 생존담이 될 수밖에 없다.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현대사회의 세대 간 적대에 관한 가장 출중하고도 문제적인 텍스트다. 이 소설은 주인공 브루노와 그의 아들, 즉 68세대와 포스트 68세대의 관계를 통해 근대적 삶의 태도가 사실상 해체되어버렸음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브루노는 우울증 때문에 어린 나이에 가진 자신의 아들을 돌보지 못했고 그의 아들은 사춘기가 되면서 아버지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게 된다. 급기야 아들은 젊은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성적 라이벌이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것도 물려줄 게 없었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 어떤 존경도 비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시간의 우리(the same cage of time)” 속에서 적대하고 경쟁한다. ‘약속된 미래’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다. 기성세대는 다음세대에게 무엇도 약속할 수 없다. 성장은 탈낭만화되었고 처절해졌다.

 

이제 지젝이 말한 럼스프린가는 아이러니가 된다.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저항이 체제에 포섭되고 그 재생산에 복무하게 되는 상황이 결코 아니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전 세대와 같은 기회가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장의 한 단락을 영원히 마무리하지 못한 채 영원히 성장해야하는 악몽이다. 헐리우드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처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같은 날이 반복되는 삶 말이다. 다시 말해 현재 젊은이들의 공포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체제로의 편입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저성장 시대의 성장서사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는 정확히 이것이다. 탈근대의 성장담은 완결되지 못한다. 이것은 미완으로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장의 근본적 불완결성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