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24. 11:40

영악한 처세가 혹은 포스트모던한 주체

"미친 듯 헤매도 내뜻대로 사는 행복 위해"
호스트바 나가는 대광고 '종교자유' 시위 강의석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4231429305&code=900315



생각해볼 꺼리가 있는 인터뷰다. 강의석 씨가 '호빠' 나가건 택시기사를 하건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핵심은, 강의석이라는 인물의 내면에서 '세계평화'가 '개인의 행복'으로 반전되기까지의 과정이겠다.

두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다시피 '영악한 처세가'로서의 강의석이다. 고3 이후 그가 살아온 이력을 보면, 확실히 그런 면모가 보인다. 고등학교 때의 운동경력을 훈장 삼아 대학에 진학하고, 비주류적 방식으로 또래와의 경쟁우위에 서려는 '어린 권력자'들의 모습은 굳이 강의석 씨의 예가 아니라도 이미 심심찮게 목격되어 왔다. 강 씨의 경우는 서울대 법대라는 레떼르까지 달았으니, 튀면 튈수록 주목받기 쉽다. 본인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미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만찮은 언론플레이 능력을 보인 이가 아닌가.

더구나 1990년대 초반 고등학교에서 운동을 했던, 이른바 '고운 세대'를 기억하는 이라면 강의석 씨를 바라보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진다. '고운 세대' 중 일부는 부당한 입시제도에 대한 거부 차원에서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졸'이란 딱지를 붙인 채 고통받아 왔다. 인생 '망가진' 사람 여럿이다.

그러나 만약 강의석 씨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사회운동에 매진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누구도 그런 삶을 강의석 씨에게 요구할 권리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씁쓸해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사회적 투신, '앙가주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결단에 속하는 문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짐을 온전히 본인의 어깨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앙가주망은 존경해 마땅한 행동이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이런 우연에 가까운 개개인의 결단에 운동판의 생존을 의지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관행이 아닌가. 나는 그것이 오늘날 진보 또는 좌파의 불임현상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시선은 강의석 씨를 '포스트모던한 주체'로 보는 것이다. 강의석 씨는 어렸을 때는 '세계평화'를 고민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개인의 행복'을 찾게 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세계평화'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고민이 '개인의 행복'이라는 작은, 그러나 실존적인 고민으로 단번에 환치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포스트모던적'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평화'와 '개인의 행복'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 단계가 소거돼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일본사회 오타쿠의 특징으로 지적했던 증상이다.

대부분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세계평화'와 '개인의 행복' 사이의 공간에서 양자를 규정하고 붙잡아두는 고리 역할을 한다. 정치사회적 공간이 매개되지 않으면, 세계평화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고 개인의 행복은 대개 '먹고사니즘'으로 귀결되고 만다. 강의석 씨의 행보는 2008년 한국사회의 그 '잃어버린 고리 (missing link)'에 관한 하나의 스냅사진 같은 거다.

강의석 씨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별개의 것은 아니다. 영악한 처세가이건 포스트모던한 주체이건 어떤 사회구조 하에서 개인은 매 순간 생존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으며, 강의석 씨는 그 나름의 생존방식을 치열하게 궁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복하게 잘 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른 20대가 저렇게 하다간 십중팔구 망한다는 거다. 저건 고등학교 때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현재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