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3. 12:49

미네르바, 그리고 불변조건


미네르바 사건에서 그의 개인능력을 차치하고 생각해보면, 이것은 한국사회의 몇 조건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발화했다. 현재 생각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가. 경제적 조건
1. 국가규모의 경제위기
2. 정부, 특히 경제운용팀에 대한 신뢰 하락 가속
3. 개인단위의 경제위기 대응전략 및 전망 부재


나. 정치적 조건
1. 행정권력에 대한 입법권력의 합리적 견제 부재
2. 대안정치세력 및 씽크탱크의 부재 혹은 존재감 미미
3. '한나라당/반한나라당 전선'의 관성


다. 사회적 조건
1. (위 조건들에 의한) 음모론적-냉소적 사고방식 일반화
2. 기성매체와 경제학자 등의 지식인에 대한 신뢰 하락 가속
3. 아고라와 블로그로 대표되는 '익명 지식인'의 등장과 그 판타지의 확대재생산



내가 주목하는 점은, '미네르바 개인(의 구속)을 어떻게 볼 것이냐' 따위가 아니다. 이런 건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잘 정리하고 있는 중이니까 새삼 말을 덧붙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 난 '고유명사 미네르바'의 체포만이 아닌, '일반명사 미네르바의 등장에서 체포까지'의 큰 단락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가,나,다 조건들을 모두 합치면 미네르바의 등장은 필연에 가까워진다. 약간 부연설명을 하자면, '정치적 조건' 부분은 미네르바가 취하고 있는 마니즘적 선악대결구도가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게 만드는 촉매가 됐다. 굳이 비유하자면 '리만형제'와 한나라당은 '왜구', '범개혁세력'과 민주당은 ('왜구'와 싸우기는 하는데 무능한) 원균, 미네르바는 이순신이다.  그러나 그 이순신은 펀드와 주식 이야기가 일상인 특수한 개인들을 위한 멘토, 요컨대 '인격화한 처세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흥미로운 건 위에 적은 조건들 대부분이 10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는 "모든 계급을 대표하겠다"던 루이 보나파르트와 매우 흡사한 대통령을 2002년에 선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관료에게 무력했던 그는 진짜 포퓰리스트가 되지는 못했다) 어쨌든 '다-3'만 최근에 생겨난 현상이고, 나머지 조건들은 10년전 금융위기 당시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건 반복-고착된 일종의 불변조건, 한국사회-한국자본주의의 '상수'라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조건'에 해당하는 부분은, 포퓰리스트의 등장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쉽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네르바가 전문대졸 30대 백수라는 점이 밝혀졌으니, '그 정도의 예측'도 못했던 기성매체와 지식인에 대한 냉소는 더욱 강렬해질테고 반복상존하는 경제위기는 인민의 정치적 성숙을 지체시킬 가능성이 높다. 인민들 스스로 정치,사회,경제적 제약조건을 깨부수려 하기보다는 '학벌과 경력을 갖춘 진짜 미네르바'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거다. 예수의 죽음이 예수의 재림을 약속하는 것처럼, 미네르바의 구속은 아직 오지않은 진짜 미네르바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진짜 미네르바가 나타나면 우리는 진짜 행복해질까?  진짜 미네르바는 대체 무엇인가? 열악한 담론유통구조와 취약한 의회정치, 반복적 경제위기의 세 요소가 바로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최적의 토양이다. 최근 벌어진 이 '반지성주의적 블랙코미디'가 더이상 코미디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