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1. 23:30

냉소적 주체는 어떻게 눈먼 정의가 되었나 [자음과모음R]

냉소적 주체는 어떻게 눈먼 정의가 되었나
타블로 사태와 악플러의 사회심리학


이른바 ‘타블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햇수로는 3년 넘게 끌어온 사건이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끓다 사라져갔다. 가장 고통 받은 사람은 타블로 본인과 그의 가족이다. 이 사태를 통해 누구도 이득을 본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가 피해자다. 타블로의 팬들, 지인들, 이 사태를 계속 지켜봐야했던 시민들, 심지어 힙합 가수의 학력이 거짓이라는 걸 밝혀내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투입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타블로 사태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신상털기(인터넷에 특정인의 사적인 정보를 폭로하는 적대행위)’들과 공통점도 있지만, 유달리 특이한 점도 많은 사건이었다. 한국사회의 모순을 아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사태의 특정 국면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사태는 ‘극소수 정신병자가 인터넷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으로 단순히 정리될 수도, 정리되어서도 안된다. 냉소적 주체가 사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타블로 사태는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시민이라는 주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 그 전에 먼저 사태의 전말부터 들여다보기로 하자.


‘타블로 사태’의 전말

힙합그룹 에픽 하이의 리더 타블로는 데뷔 초부터 자신이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영문과 석사 출신이라 밝혀 화제가 되었다.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 스타가 된 후에도 타블로의 학력은 언론에 의해 거듭 노출되었고, 특히  평균적으로 5~6년 이상 걸린다고 알려진 스탠퍼드 대학교 영문과 학·석사 동시이수 프로그램(co-terminal master program)을 불과 3년 반 만에 졸업했다고 타블로 자신이 밝힘으로써 더욱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2007년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 등과 같은 유명인사와 연예인의 학력조작 스캔들이 줄줄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타블로의 학력에 대해 인터넷에서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타블로는 이에 대해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간간히 인터뷰 등을 통해 억울함과 답답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타블로 학력 의혹은 끊이질 않았고 이에 타블로가 2010년 4월 “거짓소문으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한 네티즌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타블로 학력논란은 다시금 수면위로 급부상한다.

2010년 5월에는 왓비컴즈(whatbecomes), 일명 ‘왓비’라 불리는 네티즌에 의해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카페가 개설됐고, 곧 상진세(상식이 진리인 세상)라는 카페도 개설되어 이 두 카페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타블로 학력 의혹이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했다. ‘왓비컴즈’는 타블로 사태 전반에 걸쳐 핵심적 역할을 한 네티즌으로 사실상 타블로 학력의혹을 제기한 집단의 리더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타블로는 트위터 등을 통해 “나와 가족 모두가 고통 받고 있다”며 참담한 심정을 여러 차례 밝혔고 나름의 해명도 시도했지만 논란은 수십 개의 쟁점들로 진화하며 확산되었다. 학력 의혹을 제기하는 카페 회원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타블로 학력 의혹 관련 게시글이 노출되는 경우가 매우 잦아졌다. 2010년 8월에는 타블로의 학력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서울 주요 도심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MBC스페셜’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 직접 가서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취재한 내용을 2010년 10월 1일, 10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방송, 학력의혹 상당 부분이 해명되면서 여론이 급격히 타블로 편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방송 직후 타진요 회원 수가 18만 명을 넘기는 등 타블로 사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서초경찰서는 “타블로의 학력은 사실”이라 발표했고, 수사과정에서 ‘왓비컴즈’는 50대 후반의 미국국적 남성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상진세 회원들은 한국경찰의 수사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며 미국의 FBI에 수사 의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찰이 인터폴을 통해 ‘왓비컴즈’를 체포하겠다며 압박하자, 10월 11일 ‘왓비컴즈’는 <시카고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타블로가 이겼다”“더 이상 학력인증요구를 하지 않겠다”“한국과 연을 끊고 지역을 떠나겠다” 등의 입장을 밝혔다. 2010년 10월 22일 상진세는 공식사과문을 발표하고 카페를 폐쇄했다. 타진요의 일부 회원들은 여전히 “타블로 측에 의한 매수설” 등을 주장하며 ‘타진요2’ 카페를 개설하는 등 반발하고 있지만, 법적 절차만 남겨놓은 채 사태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상이 타블로 사태의 간략한 요약이다. 하지만 역시 흥미로운 점은, 학력논란의 전개과정이나 쟁점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까지 한 가수의 학력 의혹에 매달리게 만드는 기제가 무엇인가라는 점이겠다.


악플러, 최고로 사회화된 인간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시대는 냉소의 시대가 되었다.” 냉소주의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좀 더 부연하자면, 자신이 하는 짓이 속아서 하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왜?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소적 주체들에게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폭로하고 도덕적 정당성을 강변하는 계몽주의는 별로 효과가 없다. “결국 돈 때문에, 제 밥그릇 때문에 저러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바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이런 태도 아래에는 진위(眞僞), 선악(善惡), 미추(美醜)라는 고전적  판단범주에 대한 의심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의심은 물론 데카르트 이후의 것이다. 냉소주의자들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또는 무엇이 원본이고 복제인지) 알기조차 어려운,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는 세계’에서 사실상 유일한 가치 기준은 가격(price)이라는 사실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런 가치기준이 어떻게 부조리한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지 까지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타자가 나의 눈먼 믿음을 배반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 때문이며 이 불안이야말로 냉소주의를 믿음과 현실의 간극을 봉합하는 주체의 전략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냉소적 주체가 근대 이후 인간주체의 중요한 전형이 된 까닭은,  이런 태도가 타자가 개별 주체에 가하는 구조적 압력을 효과적으로 견디고 적응하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타자가 가하는 압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타자의 욕망이다. 우리는 타자에게 끝없이 묻는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그래서 냉소적 주체가 가장 안도하는 순간은 타인이 어쩔 수 없는 속물(snob)임을 폭로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얄팍한 거짓을 밝혀내 일말의 정의를 실현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말로 깨달아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상대와 나의 ‘등가교환’이 가능하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질서 아래에서의 ‘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는 의미에서의 안도다. 이것은 또한 의도나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동일한 질서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기도 하다. 냉소적 주체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탈주술화하는’ 주체인 셈인데, 냉소주의라는 태도는 교환관계가 가능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 건 도약(salto mortale)’을 해야 하는 주체가 들어놓은 일종의 보험이기도 한 셈이다.

이른바 인터넷 악플러들의 스테레오타입은 ‘사회부적응자’‘맹목적 광신도’이다. 이를테면 어둡고 담배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음침한 사람이거나 혹은 충혈된 눈으로 수십 개의 원도우 창을 띄워놓고 모니터를 향해 욕설을 지껄이는 사람이다. TV 공익광고 등에서 표현되는 이미지가 정확히 그것이다. 타블로 사태에 대한 일부 정신과의사들의 글이나 코멘트를 보면, 학력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 중 핵심인사 몇몇은 마치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인양 묘사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진단은 매체를 통해 접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온전한 전문가적 소견이라 보기 어렵다. 한 가지 명확한 점은, 타블로의 학력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사람들은 결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대체로 고학력의 화이트컬러 또는 지식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알려졌다. 즉, 이들은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를 스스로 잘 안다 여기는 사람들이다.

악플러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사회부적응자’이거나 ‘맹목적 광신도’이기는커녕 현대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인간형, 즉 냉소적 주체들이라는 점을 금세 알 수 있다. 어떤 사안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런 부분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담론화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오히려 악플러들은 공교육체계가 요구하는 도덕이나 상식 따위를 아주 우수하게 내면화한 사람들, 다시 말해 주류질서와 논리를 체화한 인간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한 마디로 가장 사회화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세상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돈과 외모와 학벌이 지배하는 곳이다. 또한 이들은 타블로가 우수한 성적으로, 그것도 조기 졸업했다고 주장한 스탠포드 대학교가 얼마나 대단한 ‘학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이 타블로에게 가진 반감의 정체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 학벌주의에서 비롯한 열등감, 콤플렉스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보여준 언술들을 종합해보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형 평등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라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 1)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는 데 비해,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처지에 서면 필연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처지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타블로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스탠포드를 졸업하고 힙합 가수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을 매우 강한 어조로 밝힌 적이 적지 않았다. “아니 왜 스탠포드씩이나 나와서 힙합같이 저급한 음악을 하냐”고 묻는 방송관계자에게 타블로가 격렬하게 항의했다는 이야기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였다. 거칠게 말해서, 타블로는 초일류 명문대학교 학벌과 힙합이라는 흑인 음악 중에 후자를 택한 사람이었다. 학벌주의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넘어 분노를 살만한 일이었다. 요컨대 타블로 사태에서 학벌주의가 문제라면 그 내용은 타블로의 학벌이 너무 좋다는 게 아니었다. 그 좋은 학벌을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한국인이 마땅히 승복해야할 ‘숭고한 질서’를 하찮게 취급했기 때문에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타블로는 학벌질서의 승리자인 동시에 교란자이다. 학벌주의에 포획된 냉소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분노하는 경우는 자신과 비슷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 자신보다 나은 학벌을 획득했을 때가 아니다. 냉소적 주체는 그런 부조리한 상황을 어떻게든 합리화시킬 수 있는 수십 가지 방식을 체화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학벌이나 돈과 같은 주류의 상징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사실은 서울대를 못 나온 열등감 때문에 서울대 비판을 하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정작 냉소주의자들이 가장 패닉에 빠지는 순간은, 자신들의 평등주의적 열망이 가리키는 숭고한 상징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자들이 그 상징질서 피라미드 최상층 스펙을 이미 획득한 사람일 경우다. 이 경우 냉소적 주체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까. 냉소를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보다 근본적 차원의 성찰로 승화시키는 기적은 물론,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로 냉소적 주체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굴복’이냐 아니면 ‘적대’냐. 

굴복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 타자를 인정하고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추인하는 것이다.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화려한 스펙을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하였구나”라고 감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사회적 질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연대나 지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열광 혹은 팬덤에 가까운 태도이다. 실제로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정치인의 경우, 자신의 명백한 정치적 이익을 내던지는 일종의 ‘정치적 희생제의’를 감수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이런 희생제의를 통해 획득한 자산은 정치적 정당성이 아니라 ‘정치적 순결성’ 혹은 소위 ‘국민에 대한 순정’이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대중의 정치적 지지라는 게 그렇게 형성되어왔다. 한편 그렇게 굴복하지 않은 경우엔 매우 공격적인 방식으로 적대감이 표출된다. 2010년 3월 사회적 파장을 몰고온 김예슬 선언에 대한 수많은 대학생들의 냉소-“나도 포기할 학벌이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비아냥-가 바로 그런 감수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도착증적 정의(正義)’ 너머

타블로 사태가 우리에게 새롭고 낯설며 의미심장한 사건인 까닭은 냉소적 주체들이 어떻게 ‘눈 먼 정의의 사도’로 변신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 때문이다. 냉소적 주체의 평등주의적(동시에 속물적인) 열망 자체가 타자에 의해 무의미해지고 해체될 위기에 놓였을 때, 냉소적 주체는 스스로가 어떤 실익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고 중립적으로 사회정의를 요청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그 주체는 타자의 시선을 늘 염두에 두기에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편, 자기정당성의 표식으로 극단적 반실용주의자의 면모와 종교적 열정을 방불케 하는 신실성(sincerity)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지루하고 처절한 진위공방이 누구에게도 이익을 안겨주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타진요 또는 상진세의 문제제기를 사심 없이 순수한 ‘진실추구’ 혹은 ‘정의구현’으로 만들었던 핵심적인 측면이었다. 이것은 가히 ‘도착증적 정의’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진리추구의 형식은 이른바 뉴사이언스운동에서 과학의 힘을 맹신하는 종교인의 모습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바 있다.

타블로에게 요구한 ‘진실(타진요)’과, 세상에 요구한 ‘상식(상진세)’의 공통점은 그것이 한국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적 가치들이라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시민이라는 ‘중립적 주체’에 관한 판타지의 확대재생산이다. “나는 정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으로 시작하는 대중들의 발언은 실제로 아주 정치적이고 당파적임에도 불구하고 강박적으로 중립성을 가장하고 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전부는 아니다. 독도 문제나 영화 <디 워>, 황우석을 말할 때는 중립적 주체라기보다는 애국주의 또는 국익주의 2)적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립적 시민’에 대한 판타지는 하나의 경향으로 비교적 명확히 감지된다. 그들은 왜 그렇게 중립적 시민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광기어린 반공주의가 지배해온 역사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적 가치의 내용보다 그 가치를 주장하는 ‘자격’을 더 문제 삼는 기묘한 결벽증도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결벽증은 사회에 냉소적 주체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생긴 역설이 아닐까. 진실을 추구하고 상식을 주장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냉소주의적 확신이, 중립성에 대한 판타지를 반대편에서 강화하는 상황 말이다.

문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개별적인 악플러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표면적인 해프닝일 따름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오늘날 시민들이 개인적으로는 냉소적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적 가치를 활발히 주장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보더라도 확연히 다른 지점이며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면 냉소주의가 도착증적이고 맹목적인 정의로 귀결되는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신실성(sincerity)과 진정성(authenticity)같은 담론들을 동원해가며 정의(justice)를 주장하는 자의 자격을 따지는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식의 태도는 기껏해야 주체의 윤리적 성찰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냉소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대신에 정의의 내용, 이를테면 공정성(fairness)이 과연 이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유효하고 덜 요효한지 등에 대해 치열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이 악플과 욕설이 넘쳐나는 쓰레기장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시민주체가 활발하게 재구성되는 담론공간이며 현실과 결코 분리될 수도 분리해서도 안되는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냉소주의 시대의 시민적 주체의 재구성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타블로 사태가 남긴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다.

 
1) 한국형 평등주의:
  (박권일, 부자에게 유리한 한국형 평등주의, <시사IN> 56호 2008.10.06.
  강준만, 한국형 평등주의, <한겨레> 2008.12.14.)

2) 국익주의:
  공동체 그 자체나 공동체의 어떤 숭고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이 개인과 기업의 경쟁력과 이윤축적에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을 근거로 삼는 애국주의. ‘내가 나라를 사랑하는 데에는 명백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경쟁의 프레임에 기반한, ‘국가경쟁력 담론’으로서의 애국주의.
(박권일, 국가가 침몰한 자리에서 인양된 낯선 아이러니, <자음과 모음 R> 2호)
 


*<자음과 모음 R> 3호